그림

봄동네 꿈동네 색동네

여왕폐하님 2003. 2. 14. 23:11
오랜만에 그림을 다시 보았다.

전시회가 끝나고나서 지금까지
아직 나는 붓을 잡지 않았다.
붓 잡기가 겁이 난다.

지금도 캔버스에 붓으로 물감을 칠하는 것을 상상하면
가슴이 뛴다.
전에 먹어 보았던 맛있는 음식을 상상하면 입에 침이 고이듯이
아침에 마시는 커피향을 상상하면 가슴이 두근거리듯이

커다란 붓에 물감을 듬뿍 찍어
잘 묻는 캔버스에 썩썩 칠을 하면
으아-
얼마나 신이 날까.
그러면 나는 또 거기서 얼마나 헤어나지 못하고
또 밤을 샐까.

그래서 아침새벽녘에 우유가 문앞에 놓이는 소리
신문이 문앞에 던져지는 소리
그러느라고 그 아침새벽 부지런한 사람이
계단을 뛰어오르내리는 소리를 듣고
감동을 하고
나도 오늘은 보람있게 보냈구나
얼마나 흐뭇해할까.

그런 상상을 하면 또다시 가슴이 뛴다.
그림을 그리는 것도 좋고
그림을 그리는 것에 몰두하는 것도 좋고
그림을 그리는 것에 몰두하고 있는 나의 모습도
좋다.

그렇지만 두렵다.
색이 제대로 칠해질까 붓이 제대로 잡힐까
하도 오래되어서 붓잡는 방법도 다 잊은 것 같다.
색이 안 칠해질까봐
쓸데없는 색을 칠해서 물감만 버릴까봐
두렵다.

그렇지만 제일 두려운 것은 그게 아니다.
더 두려운 것은 캔버스의 수가 늘어나는 것이다.
그렇게 자꾸 캔버스의 수만 늘여나가면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나는 솔직이 그게 제일 두렵다.

그렇다면 그건 과연 그림 그리는 사람의 자세가 아니란 말인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이런거 저런거 생각지 말고
무조건 그림만 열심히 그리면 되는 것인가.
모르겠다.

지난번 전시가 끝나고 지금까지 나는 그래서
자중하고 있는 중이다.
캔버스 수는 한번 늘리면 줄어들기 어려우니
되도록 늘리는 시기를 늦추려고말이다.
마치 나의 체중 수치처럼.

하지만 언젠가는 나의 손에 발동이 걸리고
그래서 또 아침새벽 신문배달부의 부지런한 걸음걸이소리를 듣게 되리라는 걸 알긴 안다.
그리고 또 나는 그런 나의 모습을
또 남에게 자랑하고 싶어할 것이다.
어린아이처럼.

봄동네 꿈동네 색동네에서 놀고 있는 나는
과연 언제나 철이 들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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