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맑은날에 그리고 싶은 노래(하)

여왕폐하님 2001. 1. 31. 01:30

그때까지도 나는 언니와는 물론 작은오빠하고까지도 같이 한 방을 쓰고 있었으므로(큰오빠는 미국 유학중이었다) 그 크지 않은 방에는 꽤 여러가지 물건들이 혼재해 있었다.

베니아판으로 만들어진 낡은 책상과 검은 색 쇠다리에 질 나쁜 비날방석이 깔려 있는 볼품없는 의자가 방의 양쪽 구석에 서 있었고, 아버지한테서 물려받아 우리 4남매가 어렸을 때부터 차례차례 써 오던 서랍이 두개 달린 앉은뱅이 책상이 반질반질하게 윤이 나는 모습으로 또다른 구석에 앉아 있었다.

책장도 구식이고 무어든지 별볼일없는 그 방에 약간 어울리지 않는, 그러나 가장 그럴듯 해 보이는 물건은 언니의 피아노였다. 엄마가 언니를 위해 특별히 출혈을 해 마련해 주신, 우리집에서는 가장 빛나는 특수가구였다.
언니는 그 피아노로 동네 조무래기들에게 레슨을 해서 용돈을 벌었고 나는 피아노 위에 조그만 물건들을 올려놓아 장식을 하고 있었다.

사실 나는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으므로( 왜냐하면 나는 피아노를 못 배웠기 때문에 칠 수가 없었다) 대신 피아노 위에 놓여 있는 인형들을 그렸다.

나는 내 마음 속에서 떠도는 노래들을 그리고 싶었고 내 가슴 속에 숨어 있는 그림들을 부르고 싶었다.

나는 계속 그렸다. 나의 얼굴 나의 손 나의 발, 언니의 자는 얼굴, 오빠의 자는 모습, 언니 하나 오빠 둘의 시계 세 개, 그리고 친구의 얼굴 사진---.

그때,
그때가 나의 절정이라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그때까지도 그림이 내 속에 얼마만큼 파고 들어가 있는지 전혀 눈치를 못채고 있었다.
그림이 앞으로의 나의 인생에 얼마나 큰 위안이 되고 얼마나 큰 힘이 될 지를 전혀 예측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냥 다만 그렸을 뿐이다. 매우 소극적으로.

이미 나의 갈길(앞으로의 직업)은 정해져 있는 상태였고(물론 나의 결정을 말한다) 그림은 그런 나의 미래에 전혀 영향을 줄만한 요소라고 생각을 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지금도 나는 그냥 그림을 그린다. 매우 적극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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