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파아란 하늘에 하아얀 꽃이 피어 있다 (청주 상당산성)

여왕폐하님 2001. 4. 21. 08:13
파아란 하늘에 꽃이 가득 피어 있다.
캔버스 바탕에 밝은 하늘색을 다 칠해놓고 그 위에 연하양색(?)으로 예쁜 꽃모양을 가지가지 그려놓으면 저 모습이 나올까?

별러별러 드디어 청주에 갔다.
지난해 가을 큰 녀석과 갔다 온 이후 올해엔 기필코 그 상당산성의 봄의 모습을 보리라 다짐하고 있었다.

도착한 날 저녁에 노을진 붉은해가 지난해 가을에 이어 또다시 감격적으로 날 마중나왔는데, 아마도 나의 영원한 친구 '분홍모래소녀 미야'가 날 위해 특별히 만들어놓은 이벤트 같았다. 난 그만 깜빡 잊고 있었는데 그 친구는 역시 나이를 먹지 않아서 그런지 여전히 총명하다.

다음날도 날씨는 그만이다. 정말 파란 하늘이 유럽의 하늘 못지않다. 햇볕도 따갑다기보다는 오히려 충분히 따스하고, 심술궂은 봄바람도 없다.

지난해 가을 짙은 안개비 속에서 살짝 보여주던 은밀한 분위기와는 아주 다르게, 산성은 푸짐한 꽃나무들로 휩싸여 새파란 하늘색을 배경으로 밝고 화사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산성입구에 도착하자마자 우선 뒤돌아서서 내가 올라온 벚꽃길을 스케치했다.
지난 가을 아침 안개비 속에서 아름다운 단풍으로 아취를 만들고 있었던 그 나무들이 바로 이번엔 화려한 흰꽃들로 성장하고 양쪽에 늘어서서 길을 반짝여주고 있다.

'아~ 저렇게 생긴 모습이었구나. 저 이쁜 것들을 그 녀석도 보야야하는데-'
같이 오지 못한 큰 녀석한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나 혼자서만 저 아름다운 모습을 본다는 게.

저만큼 위에 있는 성문을 바라보니, 새파란 하늘색 바탕에 연분홍과 초록과 연두색이 뭉글뭉글 칠해져있는데, 특별히 튀지도 않고 진하지도 않은 색들이 사이좋게 모여있는 모습이 마치 풋풋한 새색시들이 옹기종기 모여 서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역시 그 날의 주인공은 벚꽃, 그 벚꽃무리의 소담스런 모습을 잘 내세워주고 있는 것이 바탕색 하늘이다. 그 바탕색은 선명히 눈에 띄기도 했지만 또 그 바탕색 때문에 그 위에 칠해져있는 색들이 더 돋보였다.

나는 산성아래 쫙 깔린 잔디 위를 천천히 걸어다니면서 성문과 성벽과 나무들과 하늘을 그렸다.
검은 4비 연필로.
저 많은 색깔들의 합창을 검은색 하나로 표현하다니-.

짐을 챙길 때 혹시해서 가지고 간 색연필들을 꺼냈다. 되든지 말든지 색을 좀 칠해보았다. 색연필을 챙기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봄은 역시 색깔인데-.

나는 파란 하늘과 흰 꽃모양들의 그 특이하고 섬세한 경계선과 색상대비, 그리고 꽃무더기 틈 사이사이로 보이는 자그만 파란 점들을 표현하고 싶었는데 그건 연필이나 색연필만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했다. 머릿속에 그려뒀다 집에 가서 유화로 한 번 그려 볼까나.

성문으로 올라가는 돌길에는 고목이 된 벚꽃나무가 서 있었다. 그 크고 긴 가지가 휘어져 혼자서 그 오솔길을 다 가리고도 남았다. 그 커다란 꽃그늘 아래에 들어서서 나무의 끝이 어딘가 궁금해 위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나무의 끝은 보이지 않고 눈 위로 보이는 거기 파아란 하늘에 하아얀 꽃들이 점점이 무리지어 피어 있었다. 파아란 바탕에 하아얀 꽃인지, 하아얀 바탕에 파아란 꽃인지 도대체 구분이 안되고 있었다.

나는 한참동안 서서 그 황홀한 광경을 보며 생각을 했다.
'파란 색을 바탕에 칠하고나서 그 위에 하얀 꽃들을 점점이 그리면 저 모양이 나올까? 하얀 꽃들을 그리고나서 파란 색으로 꽃 가장자리를 만들며 배경을 칠하면 저 모양이 될까? '

그러나 나는 이도저도 모두 포기하기로 결정을 했다. 아무래도 자신이 없다. 저렇게 이쁜 색과 이쁜 모양은 도저히 흉내낼 수 없다.

그리고 또 이렇게 생각했다.
'그래 그냥 보자. 저 이쁜 모양 그대로 그냥 즐기자. 눈에다 가슴에다 담아두었다가 나중에 생각이 나면 그때 다시 그려보자.'

망루에 올라서서 저 멀리를 보니 산의 능선과 그 앞쪽에 보이는 벚꽃무리의 모습이 내 발을 잡는다. 나는 스케치북에 그 모습을 그리고 오솔길을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에 방금 본 그 풍경이 또 보이는데 볼수록 구도가 마음에 든다. 그래서 또 한 번 그렸다. 그리고 조금 후에 또 그렸다. 근데 잘 안 되었다.
내려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조금 전의 그 구도를 또 그렸다. 역시 썩 맘에 들게는 안되었다.

그러나 하여튼 그렇게나 많이 시도를 했으니 집에 가서 틀림없이 유화로 옮겨야하지 않을까.

버스를 타고 청주박물관까지 갔다. 박물관에는 구경온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전시관 매표소 앞으로 걸어 올라가니 그 안에 있는 사람이 나를 마중하려는 듯 앞쪽으로 나오고 있었다. 나는 그 사람을 실망시키고 옆쪽으로 돌아가서 지난해 커피를 마셨던 그 자판기 앞으로 갔다. 근데 불행히도 그 자판기는 고장이 나 있었다. 그렇지만 그 자판기에 누가 써놓은 나의 이름과 하트모양은 지워지지 않고 그대로 있다.

미처 보지 못한 내 이름자가 써진 모양을 큰 녀석이 발견하고 웃으면서 '엄마, 엄마하고 누구예요?'하던 게 생각났다. 안 지워지는 매직펜으로 써서 그런가 아직도 또렷이 남아 있는데 하트 앞에 써놓은 이름은 당사자가 그랬는지 지워져있다. 웃음지며 휘 둘러보니 '휴식동산'이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작년엔 못 보았던 건데.

그곳으로 향했다. 조금 비탈길을 걸어 올라가니 산비탈을 넓게 정리해 벤치를 만들어 놓은 자그만 동산이 보인다. 그 중 제일 위에 있는 벤치에 올라가 앉았다. 잔디가 시원하고 앞쪽에 있는 산이 시원스레 보이는데 패러글라이딩을 하는지 하늘 위에 색색가지 길다란 모양의 낙하산 같은 것들이 하나둘셋넷 떠다닌다.

갑자기 눈에 띤 쑥밭. 아 맛있는 쑥국이나 또 끓여 먹을까. 청주의 쑥은 서울의 쑥과는 맛이 또 다를까.
스케치는 그만하고 쑥을 뜯고 있는데 어느덧 햇살이 따스한 기운을 잃어간다.

아쉽지만 쑥밭을 이제 그만 내려가자.
그 파아란 하늘이 검어지기 전에 어서 서울로 가는 버스를 타자.
그래서 빨리 그 파아란 하늘에 하아얀 꽃들을 피우자.

<위=잔디에서 올려다본 성문과 벚꽃과 나무들

아래=성문과 주위의 나무들

그아래=위에서 내려다본 능선과 벚꽃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