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 레 1996-03-02 14면 () 판 기획.연재 3135자
◎?교수직은 더나은 연기자 위한 배움의 길?/?후배 뒷바라지 좋은 선배되려 충실?
기다리는 자만이 미인을 만날 수 있다.
만나면 한 두어시간은 걸려야 할 거라는 기자의 말에 처음 약속했던 시간에서 한시간을 당기자고 해 놓고선 그 시간에서 무려 40분을 넘기고 있었다.
운동장 아래쪽 비탈 위에 썰렁하게 서 있는 드라마센터. 강당 뒤에 붙어 있는 길다란 사무실은 한쪽 벽이 전부 거울이다.(어쩐지 이상하다 싶었는데 알고보니 그곳은 분장실이었다.)
기다림에 진이 빠질즈음 자기를 닮은 빨간 장미 한송이를 들고 들어와 기자에게 내어 놓는다. 역시 센스있는 신토불이의 미녀, 장미희. 이런 센스가 지금의 그를 만든 게 아닐까.
○첫강의 끝낸뒤 완전 탈진
올들어 탤런트 영화인 가수 만화가 등 대학강단에 서는 대중예술인들이 부쩍 눈에 띈다. 그 중 제일 선배격인 장미희씨는 지난해 9월 명지대학교 사회교육원 연극영화과의 주임교수가 됐다. 89년 처음 강의를 시작했으니 교수 생활도 벌써 8년째로 접어들고 있는 셈이다.
?맨처음 강의요??
(새삼스레 그때 생각이 난다는 듯이 약간 허탈한 웃음 뒤에)
?원장 선생님 이하 교학과장님, 주임님 다 내려오시고, 각 매체에서 전부 다 오시고, 사진기자까지 다 오시고. 강의를 꼭 시험받듯이 치렀죠, 첫강의를.?
당대의 명배우가 과연 대학강의는 어떻게 해낼 것인가 모두들 궁금했으리라. 모든 걸 잊어버린 채 그냥 열심히 80분 동안 ?열강?(당시 어느 신문기자의 표현)을 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누웠는데 3시간을 못 일어났다. 선생으로서 처음 치른 ?엄청난 시험?은 그를 완전한 탈진상태로 만들어버렸던 것이다.
그뒤로 1년 이상 그는 일주일에 한번 80분을 위한 삶을 살았다. 모든 영화나 텔레비전 스케줄은 강의시간을 빼고 난 나머지 시간에 맞췄다.
?강의 끝낸 그날 밤만 지나고나면 또다시 다음 강의 걱정이 밀려들고, 드라마 녹화 중에도 온통 강의 생각, 스튜디오 사이사이에도 불안감, 아 어떻게 하나, 이번엔 뭘 또 해야 하나.?
그러나 결론은 이렇다. 강의라는 명목아래 다시 공부를 할 기회를 잡은 것이다. 치열하게.
전에는 ?무지하게 성실하고 열심이고, 학생들이 공부를 안 하면 너무 걱정이 돼서 잡아 놓고 막 공부를 시키는 식?이었는데 지금은 강의 내용과 학생들이 가져가는 것에 대해 균형을 갖고 ?숨도 쉬면서? 수업을 할 정도로 노련해지고 관록도 붙었다.
독특한 억양과 함께 그런 느낌은 얼굴에도 나타난다. 20년전 데뷔시절의 귀엽고 청순한 소녀는 이제 가라앉은 아름다움이 엿보이는 성숙한 여인으로 바뀌어 있다.
○?예쁜선생님? 장난학생 없어
우리나이로 ?아직은 서른아홉?인 그의 뽀얀 피부가 여전히곱다. 그래서 예쁜 선생님한테 장난치는 학생도 많을 것 같지만 ?의외로, 천만에? 그런 학생들은 하나도 없단다. 성실하고 진지하고 집중해야만 하는 수업분위기 속에서 엉뚱한 생각은 끼어들 틈이 없는 것이다. 물론 입학하기 전에는 호기심에 짓궂은 질문을 해보려는 생각도 있지만 일단 들어오고 나면 처음부터 선생님으로 대면하기 때문에 전혀 연기자라는 생각이 안들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분위기는 사석에까지 이어져 학생들과 같이 앉아 좋아하는 연기자 얘기를 할 때도 그의 이름은 쏙 빠진다. 그러면 ?연기자로서 나는 자격이 없구나?하는 실망감이 문득 들 때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순간적인 생각일 뿐, 그는 기본적으로 연기자다. 지금 하고 있는 대학교수라는 일도 어디까지나 더 나은 연기자가 되기 위한 바탕이라고 생각한다.
또박또박 차분히 얘기하는 모습이 무언가 상당히 절제하는 느낌을 준다. 아니 억제에 가깝다. 그가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에 가졌던 많은 스트레스도 이런 식으로 억제를 했을까.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삶을 ?스트레스도 없고 에피소드도 없다?고 표현한다.
연기할 때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것은 일하는 과정 중에 일어나는 당연한 것들일 뿐 스트레스가 아니며 남들이 보기에 재미있었던 에피소드도 그에겐 단지 그냥 일일 뿐이다.
가르칠 때의 스트레스도 그는 ?모자람에 대한 반성?으로 표현한다. 가르치다가 막히는 경우 그는 책을(지식을) 머리가 아니라 배 안에다 하나가득 채워 놓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한다. 그만큼 그는 욕심이 많다. 처음 연기를 시작할 때 그런 얘기를 많이 들었다지만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낮에 선생님인 그는 밤엔 학생이 된다. 요즘 교육대학원에서 중국희곡을 공부하고 있는 중이다. 이 공부가 끝나면 또다른 공부를 계속할 것이다.
?연애도 시간이 있어야 해요. 데이트하려고 한달을 기다려야 하고 20일을 기다려야 한다면 누가 그걸 감당해요? 무시당한다고 생각하죠. 못 만나주는 저는 얼마나 힘들겠어요, 불안하고. 연애도 굉장한 정성이 필요하죠. 상대에게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이 서야 하고….?
20․30대까지는 최고의 배우가 되겠다는 목표를 향해 가느라 시간이 없었고 강의를 시작하면서부터는 그것을 향한 일정한 목표가 또 있었다. 이제야 어느 정도 안정이 됐다는 생각이다. 여유를 가지고 데이트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결혼하지 않고 사는 것도 재미있다. 퇴근해 집에 가면 하루종일 떨어져 있던 동물친구들이 눈을 반짝이며 흥분해서 그의 주위로 몰려든다. 그 친구들을 진정시키느라 같이 놀아주면 피곤도 걱정도 다 사라진다는 얘기다. 강아지 고양이 합해서 모두 일곱마리인데 고양이털 알레르기가 있으면서도 약먹고 주사 맞아가며 키울 정도로 고양이를 좋아한다.
○중고교부터 연기교육 필요
아직 인생을 정리할 나이는 아니지만 그동안 많은 일을 하면서 복잡 다양한 삶을 살았다는 느낌을 준다. ?시간을 소비한 것 같지는 않다라는 생각이 들어요. 늘 바빴고 늘 일이 겹쳐 있었지만 모든 걸 소홀히 하지 않고 어쨌든 성실하려고 노력했어요. 워낙 부족한 게 많으니까 그걸 때워보려는 몸부림이었다고나 할까요.?
장미희 교수는 새학기에 할 일이 많다. 지금까지 양적으로 팽창한 이 학과를 이번에는 질적으로 한단계 높여야 한다. 그래서 교과목도 많이 보강하고 권위있고 탁월한 재능을 지닌 좋은 선생님들도 많이 모셨다. 대외적 정기공연과 중고교 교사를 위한 오리엔테이션 작업도 계획하고 있다. 연기자로서 자질을 가진 아이를 어릴 때부터 인정해주는 교육이 이루어지길 바라기 때문이다.
?30대 초반부터 40대로 가는 길에 젊은 학생들을 위한 미력한 힘이 될 수 있다는 게 더할 수 없이 고마운 일이죠.? 그의 눈가에 행복이 넘쳐난다.<이재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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