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냉면 속의 삶은 계란

여왕폐하님 2000. 11. 2. 22:37
나보고 그림 잘 그린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나보고 예쁘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듯이.
그래서 나는 끊임없이 그림을 그리긴 했지만
늘 자신이 없었다.

초등학교 때 전국 어린이 미술실기대회에 나가서
입선한 것은 너무나 하찮은 일이었고, 어린 시절
그림 베끼기나 중학시절 만화 그리기 같은 것은
누구나 다 하는 평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 스스로나 남이나 나와 그림을 특별히 연결지어
생각하지도 않았었다. 전공을 한다거나 화가가
된다거나 하는 생각은 갖지도 못했다. 감히 내가
그럴 만한 자격이 된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나는 그냥 그리고 싶었다. 그냥 그리고 싶을 때
그리고, 그리고 싶지 않을 때 안 그리는 자유를
갖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어쩌면 나는 그림을
아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냉면 속의 삶은 계란을
이리저리 밀쳐 놓으며 아껴 두었다가 나중에 가서
호젓이 맛을 음미하며 먹으려던 고지식하고
순진한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까딱하다간 남에게 빼앗길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아니면 그림 그리는 것을 갈망하면서도 막상
그것에 빠진다는 것이 무서웠는지도 모른다.
예쁜 꽃을 꺾으면 금방 시들어버리는 게 무서워
그냥 보고만 있듯이 말이다.
지난 시절 만약 남들이 나보고 그림을 잘 그린다고
부추겨주었다면 나는 어떻게 됐을까,
그림을 전공해 화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을까.

마흔이 훨씬 넘은 때에 비로소 듣게 된
그림 잘 그린다는 소리, 예쁘다는 소리-
이제서라도 그런 소리를 듣게 되었다는 것은
얼마나 행운인가. 물론 완벽한 우물안 개구리
수준이지만 말이다.

오십이 다 되어 비로소 쳐다만 보던 냉면 속의
삶은 계란을 먹기로 했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지금까지 내가 하고자 했던 여러가지 일들이
나를 떠났지만 다행히도 그림은 그 속에서 그냥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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