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생각중

이 편한 세상

여왕폐하님 2003. 9. 9. 16:26
요즘은 아주 게으르게 살고 있다.
글도 안 쓰고 그림도 안 그린다.
그래서 아주 편안하다.

전에는 늘 무엇인가를 해야했었다.
무엇인가를 해야한다고 생각했었고
무엇인가를 하고있지 않으면 불안했었다.
무엇인가를 하고 있어야만 의미있는 삶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전에는 늘 무엇인가 하고싶은 일이 있었다.
그리고 또 늘 무엇인가 해야만 할 일이 있었다.

국민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늘 학교생활을 해야했고
그래서 숙제를 해야했고
시험을 보아야했고
공부도 해야했다.
그러나 그것은 별로 하고싶은 일들은 아니었다.
하기 싫은 일들이었다.

그래서 어서 빨리 학교생활에서 벗어나 사회생활을 하기를 바랬었다.
그리고 사회생활을 하면 즐거울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사회생활은 학교생활보다 훨씬 더 하고싶지 않은 일들이 많았다.
하기 싫은 일들을 해야만 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았다.

그것은 참 이상한 일이었다.
내가 하고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 하고싶지 않은 일들을 해야했다.
그 무슨 모순이란말인가.

어느 순간 나는 결심했다.
하기 싫은 일은 안하고 하고싶은 일만 하기로.
그리하여 사회생활을 집어치우고 나의 우물안으로 기어들어왔다.
그리고 내가 하고싶은 일만 했다.
그래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썼다.
참으로 좋았다.

그런데 한동안 그러다보니 그것은 어느새 '내가 하고싶은 일'이 아니라
'내가 할 일'이 되어버렸다.

인간의 마음이란 참으로 요망하다.
똑같은 일도 '하고싶은 일'이 되어있는 경우에는 기껍고 즐겁지만
'해야 할 일'로 변해버린 상황에서는 별 의미가 없어진다.
그리고 별 의미가 없는 일은 꼭 할 필요가 없다.

그래도 과거에 하고싶은 일이었으니까 계속 의미를 부여하며 남겨두어야할지,
아니면 현재에는 이미 의미가 없어진 일이니까 과거의 의미를 버려야할지
고민하다가
나의 진심을 따르기로 했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따르기로 했다.

이제는 내가 하고싶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해야만 할 일이란 없다.
그런 데서 벗어났다.
나는 시험을 보기위하여 더 이상 하기싫은 공부를 안해도 되고
눈비 오는 날 아침잠을 설쳐가며 더 이상 하기싫은 출근을 안해도 된다.

그래서 요즘은 게으르게 살고 있다.
요즘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은
게으르게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안하고 놀고 먹는 것 바로 그거다.

해야할 일도 없고 하고싶은 일도 없고
글도 안 쓰고 그림도 안 그리고.
어느 때는 정말로 이렇게 편하게 살아도 되는 것인가 의문스러울 때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사는 지금
나는 매우 편안하다.

무언가에 쫓기지도 않고 무언가를 의식하지도 않고 무언가에 욕심내지도 않고
그저 맘 편하고 몸 편하게 살고 있다.

옛날처럼 의미있는 삶이란 무엇인가 물어보지도 않는다.
궁금하지도 않다.

앞으로도 주욱 이런 삶을 살 수 있다면
얼마나 굉장한 축복일까.